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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면 좋지만, 안 되면 건달밖에 더 되겠냐"며 엘리트 체육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결사 반대를 했다. 임도헌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성공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 강하게 맞섰다. "공부 안 할 거면 차라리 농사나 지으라"며 책가방에 불을 질러버린 것. 임도헌은 "평소 아버지 말을 거역한 적이 없는데, 그때 딱 한 번 거역했다"며 "결국 아버지가 보내주긴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조만간 돌아오겠지' 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배구 국가대표 시절 임도헌. 한국일보 자료사진 안면마비에도 우황청심환 먹고 훈련 고집스럽게 체고에 진학하긴 했지만 3년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동네배구만 하던 임도헌은 꾸준히 실력을 갈고 닦은 선수들에 한참 뒤처졌다. 뭐든 해야 했다. 어디선가 점프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슬리퍼 절반을 잘라 발 뒤꿈치로만 돌아다닌 것도 이때부터다. 고교 3년 내내 반토막난 슬리퍼를 신고 앞꿈치로만 걸어다녔다. 지원을 끊어버린 아버지 대신 어머니에게 부탁해 어렵게 구한 납조끼를 입고 농구골대 아래서 홀로 수십, 수백 번씩 점프 연습을 하기도 했다. 임도헌은 "눈만 뜨면 운동이 하고 싶었고, 밥 먹을 때도 운동 생각뿐이었다"며 "혼자 연습에 매진하다 점호 시간을 놓친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노력은 결과로 나타났다. 고교 1학년 때 부상 당한 선배를 대신해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임도헌은 숱하게 연습했던 강스파이크로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고, 이듬해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대표팀에서도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빡빡한 훈련을 이기지 못해 낙오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임도헌은 홀로 오후 10시, 11시까지 남아 훈련을 이어갔다. 결국 선발된 24명 중 최종 12명 안에 들어 1988년 아시아청소년배구대회에 출전해 우리나라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한국 배구대표팀의 임도헌이 국제대회에서 강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던 임도헌이 제동에 걸린 건 뜻밖에 찾아온 안면마비였다. 임도헌은 "고2 때 휴가차 집으로 돌아와 오전 러닝을 했는데, 갑자기 눈에 바람이 들어오더라"며 "처음엔 '이상하다' 했다. 알고 보니 얼굴에 마비가 와서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아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치료를 받긴 했지만 차도가 없어 꼬박 한 달을 누워만 있었다. 조금만 뛰어도 혈압이 200까지 치솟아 훈련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임도헌은 "시합을 앞두고 계속 누워있을 수만은 없다"며 우황청심환을 먹고 훈련에 임했다. "연습이 조금만 힘들어도 혈압이 급격히 올라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던 그는 훈련과 대회를 빠지지 않고 치렀다. 결국 이듬해 만 18세의 나이로 성인대표팀에 합류하는 영광을 안았다. 공격을 시도하는 임도헌. 한국일보 자료사진 '임꺽정'의 탄생... 화려한 전성기 구사 임도헌이 본격 성공가도를 달린 건 대학시절이다. 1990년 슈퍼리그 신인상을 시작으로 1993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최우수선수상(MVP), 슈퍼리그 최우수 인기상을 휩쓸었다. 성균관대 진학 후 당대 대학 배구 최고로 손꼽혔던 한양대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도 임도헌이다. 임도헌은 "당시 한양대를 다녔던 하종화 선배가 자신이 뛴 경기에선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했는데 나한테 졌다"며 "그때를 기점으로 성균관대가 한동안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졸업 후 입단한 현대자동차서비스(현 현대캐피탈)에서도 만개한 실력을 뽐냈다. 힘이 장사란 뜻에서 붙은 '임꺽정'이란 별명도 이때 만들어졌다. 임도헌은 상대 블로킹을 뚫고 지나가는 강한 스파이크로 1994년 입단 후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고, 마낙길(배구 해설위원), 강성형(현대건설 감독) 등과 함께 2년 연속(1994·1995) 팀의 슈퍼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95년 우승 때는 최우수선수로도 뽑혔다. 그러나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임도헌에게도 방황이 찾아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표로 했던 것들을 빠르게 이루고 나니 갑자기 엄청난 허무함이 밀려왔다"고 털어놨다. 방황에서 탈출하기 위한 그의 선택은 군입대였다. 잠시 배구 코트를 벗어나 자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삼성화재 감독 시절의 임도헌. 연합뉴스 '현대맨'에서 '삼성맨'으로.. 순혈주의 깬 첫 사례 제대 후 임도헌은 무릎 부상으로 오랜 재활기간을 가졌지만, 결국 재기하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했다. 아쉬움이 너무나 컸지만 결과적으론 전화위복이 됐다. 2003년 은퇴 후 지도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1년간 캐나다로 연수를 다녀왔고, 이후 한국 청소년대표팀과 성인대표팀 코치를 잇따라 맡았다. 그가 다시 리그에 발을 들인 건 은퇴 후 3년여 만이다. 청소년대표팀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신치용 당시 삼성화재 감독이 그에게 코치직을 제안했다. 여론은 불같이 들끓었다. 당시만 해도 배구계 순혈주의가 강해 각 구단 코칭스태프는 해당 팀 선수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오랫동안 '현대맨'으로 선수생활을 하던 임도헌이 삼성화재 코치를 맡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임도헌은 "내가 (순혈주의를 깬) 첫 사례다 보니 열심히 해서 결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며 "못하면 잘린다는 생각으로 배수의 진을 쳤다"고 돌아봤다. 선수시절의 임도헌이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언제나처럼 그의 노력은 빛나는 결과로 돌아왔다. 거의 매일 야간 훈련을 진행한 임도헌은 시즌 중반이나 주전 선수 부상으로 공백이 생겼을 때 투입할 조커 양성에 집중했다. 그는 "배구는 베스트6만으로는 절대 우승할 수 없다"며 "시즌 중간에 몇 경기를 뛰어주는 후보 선수들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들을 잘 훈련시켜 단 몇 경기라도 인생경기를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신치용-임도헌 체제로 10년을 이어간 삼성화재는 7시즌 연속 통합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하는 삼성화재 감독 시절의 임도헌. 한국배구연맹 제공 아픔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 많이 배웠다" 물론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임도헌은 코치생활 10년 만에 삼성화재 지휘봉을 넘겨받았지만, 불과 두 시즌 만에 경질되는 아픔을 겪었다. 2019년엔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대표팀 세대교체에 적극 나섰지만, 코로나19가 터지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23년 열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12강에 탈락하며 61년 만의 노메달을 기록, 큰 충격을 안겼고 이 대회를 끝으로 임기를 마쳤다. 임도헌은 "코로나가 유행한 2년 반 동안 대표팀을 아예 소집하지 못하면서 훈련은커녕 시합 한 번 나가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면서도 "그래도 배운 게 많았고, 내가 좀 더 과감했다면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임도헌 삼성화재 블루팡스 단장이 지난달 28일 경기 용인 삼성생명휴먼센터트레이닝센터 배구단 훈련장에서 한 손으로 배구공을 쥐고 코트 위에 서 있다. 정다빈 기자 이번엔 전문단장, 또 다른 도전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은 임도헌은 지난해 서울 방이동에서 자신의 이름을 건 배구 아카데미를 운영했다가 지난 5월 삼성화재 전문단장으로 복귀했다. 선수, 지도자 생활은 오래 해봤지만 행정직은 이번이 처음이다. 임도헌은 "사실 아카데미를 하면서도 내가 다시 배구판에 올 수 있을까 생각을 많이 했다. 좋은 기회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돼 기쁘다"며 "지도자로 이루지 못한 걸 단장으로 이루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예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건 시야다. 그는 "선수나 지도자 시절엔 오로지 코트 안에만 시선을 집중했던 반면 지금은 팀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내다보려 한다"고 말했다. 이어 "100원을 받으면 최소 110원어치 이상을 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다짐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